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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을 내는 철학책 | 황진규

oon정 2026. 5. 30.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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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을 내는 철학책 | 황진규 - 교보문고

틈을 내는 철학책 | 철학은 ‘앎’에 틈을 내고, 그 틈 사이로 ‘삶’은 변화한다. 변하고 싶은데 변하지 않는 삶 21명의 철학자들이 이끄는, 삶의 궤도를 바꾸는 철학 훈련‘나 잘 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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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정리하는데 오래 걸렸다. 분명 3,4월에 읽은 책인데 바쁘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이제야 내용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 말은 책을 안읽은지 꽤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책을 읽어야지. 전공과 다른 이야기이지만 책은 항상 중요하고, 모든 것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전공에서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뒷받침해줄 건강한 생각과 행동, 지침들이 필요하다. 나는 그걸 늘 책에서 찾았고 영화, 애니메이션, 영상 그것들로 색을 입혔다. 다시 책 읽어야지...!


[몸] 몸이 욕망하는 일을 하라_스피노자

 

17

재능은 '자연스러움'이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재능이다

재능과 성취는 별 상관이 없다

자연스러움을 얼마나 갈고 닦았느냐에 따라 한 분야의 성취는 결정된다.

 

자연스러움은 신체와 관련되 것이다

 

19

우리는 우리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재능은 '지성'의 문제라기보다 '용기'의 문제에 가깝다. 오직 용기를 내는 이들만이 경험해보지 않았던 세계에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다

 

재능을 찾는 방법은 생각을 멈추고 몸으로 부딪치면 된다.

 

21

스피노자_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서로 이해하지만, 슬픔은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정념으로 이해했다. 더 나아가 나는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이나 유쾌함이라고 부르지만, 슬픔의 정서는 고통이나 우울함이라고 말한다.- [에티카]

-> 기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삶의 활력이 증가되고, 슬픈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삶의 활력이 감소된다는 뜻이다. 

 

22

'욕망'과 '재능'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그 일을 잘할 수 밖에 없고, 진짜 잘하는 일은 좋아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재능은 신체가 기쁨을 느끼는 일을 좇는 과정에서 비로소 발견된다.

 

슬프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슬픔을 주는 일에 재능이 있을 리 없다. 

 

23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재능을 찾고 싶은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반복하게 되는 일, 기쁘고 즐겁고 유쾌하기에 계속 하고 싶은 일, 재능은 그런 일에 있다.

일을 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 기쁨이라면 그 일을 따라가면 된다. 그 길 어디쯤에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재능이 있을 테다.

 

재능을 찾고 싶다면 우리를 슬프고 우울하고 소통스럽게 만드는 일들을 멀리해야 한다. 거기에 재능은 없다.

설사 그런 일에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로 큰 성취를 이루기는 어렵다. 어떤 일이든 성취의 핵심은 반복이다.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위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_[에티카]

 

[행복] 행복은 나를 아는 일이다_벤야민

29

행복하다는 것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복잡하고 미묘하게 겹쳐 있다.

그것이 진짜 삶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완전한 행복'은 애초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진정한 행복은 행복과 불행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상태다.

 

"나는 얼마나 행불행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고 있는가?"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 점검하기 위한 질문이다.

 

행복에 대한 집착은 우리가 삶의 어느 순간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32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하다. 몰입, 즉 삶의 어느 순간에 온전히 빠져들면 된다.

 

행복이 몰입의 경험이라면, 현실적인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몰입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경우와 몰입한 뒤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이 두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행복하다는 것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_[일반통행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여전히 놀랄 일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기쁨을 줄 몰입의 대상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36

게임, 영상, 쇼핑, 술, 섹스, 마약, 도박이 행복한 몰입의 대상이 아닌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들은 오직 '나'이기 때문에 몰입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속성이 있다. 

-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도망가고 싶은 마음 (도피욕)

- 불특정 다수로부터 관심받고 싶은 마음 (인정욕)

- 섹스하고 싶은 마음 (성욕)

슬픈 몰입의 대상은 이런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을 자극한다. 

 

다시 말해, 게임, 영상, 쇼핑, 술, 섹스, 마약, 도박은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 때문에 빠져드는 대상이지, 오직 '나'이기 때문에 빠져드는 대상은 아니다.

 

37 

행복해지고 싶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을 알게 되는 경험을 조금씩 쌓아나가야 한다. 그런 경험이 충분히 쌓였을 때, 더 이상 놀라지 않고 자신을 알게 되는 상태에 이르고, 우리는 이 상태를 성숙함이라고 부른다.

 

[변화] 본질에 갇힐 것인가, 본질을 만들 것인가_사르트르

본질보다도 앞서는 하나의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도 정의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인간이다. -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46

사람은 다만 그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그대로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원하는 그대로다. 그리고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제1 원칙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다.

 

자유는 아름답거나 낭만적인 일이 결코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고 믿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은 자유가 없기를 바란다.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면, 주어진 본질(노예, 아이, 직장인, 소비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본질(주인, 어른, 예술가, 생산자)로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즉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유란 인간으로 하여금 주어진 본질을 끊임없이 넘어설 수밖에 없게 만드는 저주인 셈이다.

 

49

한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사람은 '앎'이 아니라 '즐거움', '옳음'이 아니라 '좋음', '훌륭함'이 아니라 '근사함'에 따라 변한다. 

(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얼마나 '즐거운지', 물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클래식 음악이 얼마나 '근사한지' 느끼게 될 때다. )

 

대자적 성찰을 통해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즐거움', '좋음', '근사함'의 대상이다. 그 대상을 발견하면 과거의 자신과 온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실존적 존재다. '즐거움', '좋음', '근사함'을 따라 자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해나가는 실존적 존재!

 

[욕망] 나의 진짜 욕망을 찾는 법_라캉

55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 한다. [에크리]

 

좋아하는 일을 확신하는 이들이 있다. 확신 때문에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자신만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여행지에서 확신보다 위험한 것도 없다. 인생이라는 여행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잘못된 확신으로 길을 잘못 들어서면 걸어왔던 걸음만큼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 [세미나 11]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우리 역시 좋아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내면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의 생존을 지킬 수 없는 유아기가 현저히 길기 때문이다. 

-> 타인의 절대적인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 반대로 타인이 원하는 일을 할 때 불행하다.

그러니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 양 따르는 삶이 어찌 불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타자의 욕망을 걷어 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점점 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60

이미 내면화된 타자의 욕망을 걷어 내지 못하면 진짜 '나'의 삶은 요원하다. 

 

"진짜 나의 욕망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부모(선생, 사장, 사회...)에게 사랑받기 위해 내면화했던 타자의 욕망을 걷어 내고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61

한 사람이 '변하는' 것과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다르다.

 

한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사건을 통해 주체는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우리는 좀처럼 사건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경험'할 뿐 '사건'을 맞이하지 못한다.

'경험'은 우리를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킬 순 있어도 다시 태어나게 만들 순 없다.

 

경험은 가역적 (되돌아갈 수 있는) 변화를 촉발하고, 사건은 비가역적(되돌아갈 수 없는) 변화를 촉발한다.

 

자신의 진짜 욕망을 찾고 싶은가? 주체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

일상처럼 흘러가는 의미 없는 '경험' 사이에서 '사건'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사건은 낯설고 위험하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진짜 욕망을 찾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사건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내 익숙한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 사건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가? 교통사고 같은 사랑을 긍정할 수 있는가?

 

[타자]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오직 타자를 통해 

69

"나는 이런 사람이 될 거야!"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마음 상태는 '기대'라기보다 '불안'에 가깝다.

현재 자기가 기대하는 모습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끊임없이 되뇌이는 것은 그 불길한 직감을 은폐하려는 발버둥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외재성 : 어떤 것의 밖에 이ㅛ어서 어떤 것의 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성질을 뜻한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 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 [시간과 타자]

 

지금 나의 모습은 내가 만난 타자들의 합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났던 타자들 중 능동적으로 원해서 만난 타자는 얼마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원치 않은 현재는 과거에 원치 않았던 타자들을 만났던 결과다.

 

앞으로 내가 맞이할 미해의 모습은 직슴 내가 어떤 타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75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레비나스의 말에 실마리가 있다. '진정한 관계'란 무엇일까? 불가항력적 종속 관계이다

갑자기 들이닥쳐 오고, 동시에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 그 타자의 영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에 그 타자에게 종속되는 관계. 

-> 레비나스가 말하는 '진정한 관계'다

 

대표적으로 부모-자식 관계 / 선생-학생 관계 => 비자발적인 불가항력적 종속관계

 

진정한 관계에는 '자발적인 불가항력적 종속 관계'도 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당신 뜻대로 하고 싶어요."라는 사실을.

불가항력적이지 않은 관계나 혻은 종속되지 않는 관계는 흔한 '연애'일 뿐 '사랑'은 아니다.

사랑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관계'다.

 

어떻게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사랑하면 된다. 

허황된 주체 의식을 내려놓고, 기쁜 마음으로 노예를 자처할 만큼 매력적인 타자를 만나 뜨겁게 사랑하면 된다. 그 사랑의 크기만큼 미래는 바뀐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끊임없이 매력적인 타자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싶다. 그렇게 타자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내 미래를 바꾸어나가고 싶다. 그렇게 미래에는 더 근사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 사랑은, 끝끝내 '둘'로 존재하려는 일이다_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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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융합적인 것이라는 관념의 거부, 사랑은 구조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는 둘이 황홀한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 [조건들]

흔히 사랑을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바디우는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함께 있을 때 서로 기쁜 일이 사랑이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다. _ [조건들]

 

90

우리는 사랑한 적이 있을까? 우리는 '둘'의 무대를 경험한 적이 있을까? 우리 역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하나'가 되려고 하지 않았을까?

"연애 좀 해보니까 편안한 상대를 만나는 게 사랑이더라." 이 비겁한 변명 아래, 어떤 마찰이나 갈등도 일으키지 않을 '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원숙함으로 포장하지는 않았을까? '하나'가 되려는 마음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하나'가 되려는 마음은 언제든 꼬리를 흔들며 자신을 맞춰줄 애완동물을 찾는 마음일 뿐이다.

 

그뿐일까?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흔한 타협 아래, 남자는 맞벌이할 여자를 찾고 여자는 돈 많은 남자를 찾는 것이 우리 시대 사랑의 민낯 아닌가?

 

우리는 단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은 기쁘지만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니, 고통스럽기에 기쁜 일이다. '하나'가 되는 것은 편하다. 하지만 둘이 되는 것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너'의 단독성(자유, 취향, 존엄, 욕망,,,,)을 인정하며 사랑하는 것은 지독한 불안과 갈등을 껴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로서 사랑하려 해본 이들은 알고 있다. 사랑하는 '너'의 자유와 욕망을 진정으로 인정할 때 네가 언제든 나를 떠날지 모른다는 지독한 불안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랑하는 '너'의 취향과 존엄을 진정으로 인정할 때 지독한 마찰과 갈등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랑'은 그 지독한 고통을 감당하며 끝끝내 '둘'로 있으려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귀하고 드문 기쁨이다.

 

둘이 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셋'은 되는 것은 익숙하고 편하다. 우리 사외에 '둘'의 경험을 방해하는 것들을 얼마나 많은가. 돈, 권력, 타인의 시선,,, 이 모든 것을 의식하지 않고 '둘'의 경험을 유지하는 것은 고통스럽게 짝이 없는 일이다. 가난한 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고되게 일해야한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 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세상의 시선과 싸워야 한다. 이는 모두 '셋'이 되지 않고 '둘'의 경험을 이어가려는 발버둥이다. 

 

[대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말라_비트겐슈타인

 

102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모든 시도가 인간의 뿌리 깊은 습관과 허영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말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때, 우리는 그것을 그저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라는 말 대신, 사랑하는 마음,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을 그저 삶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헛소리하지 말고 삶으로 보여줘!" 어쩌면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외로움] 왜 함께 있어도 외로울까? _ 드보르

구경꾼의 소외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 그가 넋을 놓고 바라보면 볼수록 삶의 영역은 축소되며, 그가 이러한 지배의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할수록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스펙타클의 사회]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을까?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스펙터클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구경거리를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사회의 구경꾼으로 살아가고 있다. 

 

115

강 건너 불구경하는 이는 불을 끄지 않는다

 

스펙터클은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더 노골적으로 말해, 우리가 스펙터클을 구경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대중매체는 자본의 필요에 의해 특정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일반적으로 제공한다. -> 스펙터클에 몰입하면 사회 구성원들은 점점 현실을 방관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스펙터클(블록버스터 영화, TV, 스마트폰)에 익숙해져 구경꾼이 되면 우리 내면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화면 속의 간접 경험 때문에 (화면이라는 매개 없이) 직접 경험해야 하는 것들을 이미 경험했다고 믿게 된다. 여행 유튜브를 보며 마치 자신이 여행을 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신이 경험한 크고 작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넷플릭스에서 아름다운 사랑 드라마를 보며 마치 자신이 사랑을 해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동시에 자신이 온몸으로 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게 된다. 그렇게 '여행' 혹은 '사랑'이라는 직접 경험은 상상 속으로 멀어져가게 된다.

 

구경꾼의 소외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 그가 넋을 놓고 바라보면 볼수록 삶의 영역은 축소되며, 그가 이러한 지배의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할수록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 [스펙타클의 사회]

 

우리는 왜 스펙터클을 쫓아다니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우리네 삶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스펙터클로서의 사랑(여행)을 구경할 때, 자신의 사랑이 무엇이고 자신이 어떤 이를 욕망하는지 알 수 없게 되니까 말이다.

 

구경꾼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또 있다. 스펙터클을 구경하면 할수록 더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 외로워지는가? 함께 있는 사람과 교감하고 공감하지 못할 때다. 언제 교감과 공감이 차단되는가? 각자 스펙터클에 몰입할 때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스펙터클은 잠시의 만족감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그 끝에 남는 것은 군중 속의 외로움이다.

 

[지성] 삶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_[계몽이란 무엇인가?]

 

146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연적 연령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타인의 지도에서 해방된 (즉 연령적으로 성년이 된) 이후에도 평생토록 미성숙에 안주하는 이유는 - 그들의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다. 미성숙의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 너무나 편안한 것이다

 

151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삶의 진실은 그냥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과감하게 알려고 해야 한다. 지성은 그냥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단력과 용기를 갖추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지성을 과감하게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가 없다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미성숙한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불편한, 그래서 알고 싶지 않은, 하지만 삶의 진실인 것에 대해서 과감하게 알려고 할 때, 비로소 성숙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사유] 사유는, 인간다움의 전제조건이다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서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167

짐승과 악마의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가? 공감의 부재에서 온다. 

 

철저한 무사유는 공감의 부재로 인한 결과다. " 평범한 우리 역시 사유하지 않으면 언제든 악인이 될 수 있다." -> "평범한 우리 역시 공감하지 않으면 언제든 악인이 될 수 있다." 공감은 사유의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사유는 인간다움의 전제조건이다.

 

공감할 수 있으면 사유할 수 있고, 사유할 수 있으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폭력] 더 작은 폭력, 인간적인 폭력을 위해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휴머니즘과 폭력]

 

178

우리가 중요하게 토론해야 할 것은 폭력이 아니다. 폭력의 의미 내지는 폭력의 미래이다. 이것은 미래를 향해서 현재를, 타자를 향해서 자기를 뛰어넘는 인간적인 행위의 법칙이다_[휴머니즘과 폭력]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에 대해서 폭력을 자제하는 것은 그들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부당한 폭력에 맞서는 대항적이고 대안적인 폭력, 이것이 '인간적인 폭력'이다. 자신을 위해, 동료를 위해 사장에게 할 말을 하는 것 역시 일종의 폭력이다. 하지만 이 폭력은 "인간적인 행위의 법칙"일 수 있다. 이는 자신과 동료를 지켜내는 인간적인 행위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반대로, 무분별하고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에 대해서 폭력을 자제하는 것은 그들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일 수 있다.

 

181

한 사람이 '나'라는 존재가 어쩔 수 없는 폭력임을 깨달아가고 있다. 그는 매일 조금 더 적게 먹고, 조금 더 적게 말하는 '더 작은 폭력'을 선택하려 애를 쓰며 살아간다. 그는 매 순간 더 큰 폭력 앞에서 당당하게 '인간적인 폭력'을 선택하려 애를 쓰며 살아간다. 그렇게 그는 주어진 삶의 조건 안에서 삶을 변화시키려 애를 쓰며 살아간다. 더 아름다운 세계는 그 한 사람이 모여 만들어낸다.

 

 

[결단] 내가 걸어가는 길이 곧 나의 길이다

길은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렸기 때문에 그것이 된 것이다. _ [내편] [제물론]

 

189

우울증의 원인은 결단의 부재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 내려야 할 결단을 외면하거나 유보할 때 우울증은 찾아온다. 

 

우울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된다.

 

197

무엇이든 '하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하면 느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직장을 그만둔지 10년이 지났다. 철학자이며 저자가 되었다.

 

나에게 정해진 그 어떤 길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리 주어진 길에 가디지 않는 사람에게 우울증은 없다.

 

내가 가는 길이 바로 '진짜 나'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기껏 선택하고도 중간에 주저앉는 것은 "나는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라는 부정적 운명론 때문 아닌가? 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다. 자신이 결단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갈 때 만들어지는 길이 바로 자신의 길이고 답이다. 

 

 

[행동]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몸은 여러 가지 대상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대상이다. 따라서 나의 몸은 행동의 중심이며, 그 몸이 표상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_[물질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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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물로서 생각하는 존재다. 몸을 가진 인간은 근본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다. 인간에게 '생각'이란 더 잘 '행동'하기 위한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 즉 비교,분석,분류,상상하는 능력을 과대 포장해서는 곤간하다. 어쩌면 바로 여기서 우리의 거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때로 크고 작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불행해지곤 한다. 

 

자신이 개입할 수 없는 일 앞에서 해야 할 것은 '생각'이 아니다. '행동'이다. 어떤 문제 앞에서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행동'을 다했다면, 이제 또 다른 '행동'을 해야할 때다.

그것은 자신이 개입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다. 이는 어떤 '행동'인가? 기력이 없다면 산책하고, 기력이 있다면 힘껏 뛰는 '행동'을 하면 된다. 그때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걱정과 불안은 눈 녹듯 사라지곤 한다.

 

진인사대천명 -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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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가장 큰 이득이 되는 쪽을 향한다. 우리 몸은 자연적으로 우리에게 이득을 줄 대상 앞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직장 상사를 만나면 뒷걸음질 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곁으로 가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본성대로 살면 된다. 우리의 본성은 '뇌(생각)'가 아닌 '몸(행동)'에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을 가까이하려는 자연스러운 행동 말이다. 삶의 매 순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관철하려고 애를 쓰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긴 시간 우리의 본성을 왜곡해왔으니까 말이다. 잘 산다는 것은 몸을 쓰며 산다는 것이다.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선악] 행복은 위험 속에 있다

'선악'은 가변적이며 상대적이다

고위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 라고 판단한다. 그는 대체로 자신을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_ [선악을 넘어서]

 

 

니체에 따르면, 고귀한 자(지혜로운 자)는 "스스로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자"다. 즉, 사회가 정한 '선악'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악'을 정하는 자다. 이는 허황된 말장난이 아니다. '좋고 싫음'에 따라 '선악' 개념은 달라진다. 

 

그러니 우리 역시 우리만의 '선악' 개념을 결정할 수 있다.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기에 그것은 '악'이다. 반대로 나에게 유익한 것은 그 자체로 유익한 것이기에 그것은 '선'이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각인된 사회적 '선악' 개념을 텅러내고 지혜로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광기] 광기를 존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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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상 - 비정상' 이라는 구분을 일상적으로 하며 산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삶은 정상이고, 오후에 일어나 어디에도 출근하지 않는 삶은 비정상이라고 여긴다. 나이가 차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정상이고, 나이가 찼는데도 가정을 이루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비정상이라고 여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은 정상이고, 동성끼리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은 비정상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사회적 통념에 순응하는 일을 '정상'이라고 하고, 사회적 통념에 벗어나는 일을 '비정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정상'을 긍정하고, '비정상'을 부정한다. 쉽게 말해, '정상'적으로 살고 싶고, '비정상'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불행이 도사리고 있다.